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여유와 교류, 2024
이동하며 마주한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여행하며 배운 태국을 관통하는 정신에 감명받아 이를 작업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즐거움을 의미하는 사눅(Sanuk)과 행복, 편안함을 의미하는 사바이(Sabai)는 내게 현재를 더 현명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온다. 웃는 모양을 한 바위, 오리 배를 탄 연인,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노인처럼 사소한 현상에 시선을 두면서 이전과는 한층 다른 안정된 삶을 보내고 있다.
작업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상과 나 사이 적당한 거리 유지, 한층 가벼워진 농도, 유순한 붓질. 힘을 덜어내는 행위는 단순히 보이는 결과물만을 위해서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여유를 추구하기 위해 행해졌다. 붓질을 하면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편안해지면서 사고가 확장되고, 이는 그림을 그리는 원초적인 이유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사바이 정신으로 보아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평온함, 성취감과 같이 긍정적인 감상 때문일 것이다.
안정과 행복은 고립 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된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의존적이고 결핍 있는 존재이다. 언젠가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 생각하던 때도 있었으나,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타인을 포용하고 이해해야 함을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와 세계가 상호작용을 하듯이, 직접 느낄 수 있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며 작업한다.
시간의 강제성, 2023
우리 주변엔 각각의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가지각색의 것들이 존재한다. 변화의 가장 주된 이유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를 아우르는 절대적인 개념,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기에 무수한 존재들이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현상은 시각적, 비 시각적 구분 없이 통용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을 계절의 변화, 신체의 노화가 있겠고, 간접적으로는 나이가 들며 감춰지는 동심의 표출이 있겠다.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의 강제성을 하나 둘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류의 나약함과 오만함에 대한 사례를 다양한 장소에서 목격하게 된다. 원치 않아도 신체 감각에 의해 수용되는 방대한 양의 정보(심지어 인터넷에서까지)들은 심적인 부담감과 삶에 대한 고찰을 이끌어 낸다. 점차 새로움, 탄생과 같은 신성성이 담긴 개념보다는 대상이 저물어가는 과정과 그 끝(결말)에 집중하는 본인을 발견한다.
어른, 노동, 동심, 2023
1. 어른
다 자란 사람. 어른이란 몇 단어로 단순히 정의하기 어렵다. 마냥 평화롭고 순수하던 어린 마음에서부터 멀어져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이 궁금해졌다.
2. Snow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더 이상 어릴 때만큼의 설렘을 주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로 인식될 즘이면 어른이라는 정체성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3. ○
몸과 마음이 자랐어도 어느 한구석에 남아있는 동심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온다. 바닥에 쌓인 하얀 눈을 맨손으로 굴려 눈덩이를 뭉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동심 비슷한 것을 느낀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채 작업을 이어가는 나는 마음 한 편에 언제나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그 불안감은 생성되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어느 날 눈에 들어오던 낙엽 청소부들을 보며 노동의 가치와 숭고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노동의 이면에서 아름다움과 허망함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깨우친다. 노동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포기와 같은 것들. 어느 순간부터 포근했던 겨울의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쓰레기가 된다.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희망하던 아이는 커서 집에서 쉬고 싶어 하는 게을러 보이는 어른이 된다.
나의 탄생 이전부터 노동을 해온 부모님이 떠오르고, 가족과 함께지만 외로움을 달고 사는 아버지가 눈에 밟힌다. '나이에 맞게' 살아가는 어른들이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연스레 어린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마냥 평화롭고 순수하던 이들은 현실의 벽을 마주한 뒤 본래의 모습을 감춘 채 살아간다.
혼자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눈을 뭉쳐 던지는 모습, 맨손으로 눈을 굴려 눈덩이를 불리는 모습에서 동심 비슷한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실 모두 본 모습을 감춘 채 살 수밖에 없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는 어른들이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는 이유' 같은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수많은 호기심과 질문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빠 보고서, 2022
(2021년 아빠를 주제로 한 일생 보고서를 위해 인터뷰를 한차례 진행했다. 인터뷰어로서 나누던 수많은 대화들과 평소 그를 바라보며 느껴왔던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한 사람을 보고서라는 하나의 글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문단은 인터뷰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인터뷰의 현장이 생각나 잠에 들지 못하고 액정을 두들기며 메모장에 적을 수밖에 없었던 2022년 10월 새벽의 기록이다.)
젊은 시절, 그의 캠코더와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물건의 주인이 아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었다. 평화로운 주말이 찾아올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마실은 꼭 나가야 했던, 보통의 아버지 중 하나였다.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했던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로 가득하다.
아이 셋을 키우며 생성된 고독감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는 소멸하지 않고 평생 안고 가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그 시절 가장의 무게란 참으로 무겁고 아득하다.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길러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역할을 처음 수행하던 30대의 청년은 어떠한 마음으로 가정을 꾸렸을까?
어느 날 나에게 그의 내면에 있던 아픔을 꺼내어 보였을 때,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고독이라 함은 인생을 살아가며, 아이들을 키워가며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감정이자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나이는 다 같이 먹어 가도 유난히 빠르게 저물어가는 듯한 여린 꽃 한 송이 같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전달되는 그의 감정에 이제는 눈만 보아도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그는 아주 엄격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 엄격함 사이로 의외의 모습들이 보인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날카로운 눈매가 점점 쳐짐에 따라 두드러지는 유함, 연약함이었고 그것에 대한 좋고 싫은 양가의 감정이 자리했다. 어쩌면 과거 겉으로 비친 강인한 모습에 내 멋대로 그의 인상을 각색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나이가 들듯, 부모도 점차 늙고 나약해진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 그들은 나를 아직 아이 보듯 바라보고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한 존재로 계속 남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종착지까지 2/3, 새로움과 신선함이 얼마나있을까 싶을 정도로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자식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고 더 이상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날이 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외로움과 고독감이 그를 찾아오겠지. 언젠가 나도 그의 나이가 되면 비슷한 삶을 보내게 될까?
잠에 들지 못하고 이런 이야기를 뱉어내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아마 아빠를 닮아서일 것이다. 가끔 피곤한 얼굴로 잠을 못 잤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나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술을 진득이 마시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야 비로소 긴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를 알기에 그 마음의 짐에 대하여 쉬이 묻지 못했다. 똑닮은 나 역시 새벽이라는 시간 속에 혼자 숨어 이러한 깊은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항상 우러나오던 그에 대한 불편함의 원인을 찾아낸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가장 날 것으로 느끼게 해주던 존재이기에 가끔은 그를 보는 것이 괴롭기도 하다. 마지막 감상이 안쓰러움으로 남을까 봐.
약 한 시간 동안, 난 온전히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마음껏 글을 적어 내려갔다. 가식 없이 적은 순수한 글자들만이 남았다. 당분간은 글을 못 쓸 것 같다.
2022년 10월 31일 오전 7시 36분
아마란스, 2021
지역 관찰과 이동을 통해 신체에 남겨진 감각은 세상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몇 가지 기존의 것들이 걸러지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채워지는 일이 반복된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인해 일정 구간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반복 이동해왔음을 자각했다. 이러한 행위는 특정 지역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은 나의 정체성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선정된 일정 구간은 경기도 북쪽 끝인 연천부터 의정부를 거쳐 서울까지이다.
세 지역의 대표적 특성은 각각 다음과 같다.
북쪽을 향한 경계로 발전이 더딘 곳
주거를 목적으로 아파트단지가 발달된 곳
여러 목적 달성을 위해 곳곳의 사람들이 모여든 곳
이 경로가 지금의 나에겐 반복적인 생활 패턴을 행하는 가장 익숙한 공간들이며,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날은 그저 '보통의 날들'이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아마란스라는 식물로 대변하여 화면 속 땅에 심어보자 한다. 아마란스는 낯선 땅에서도 뿌리를 내려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비가 많이 오는 땅이나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지리환경에 따라 다르게 진화하는 모습이 우리와 같다. 나는 아마란스이자 기록자로서 더 많은 땅에 우리를 심어 놓으려 한다.
한탄강(Hantan Gang), 2021
[경기도 3차 공공기관 이전]에 관련된 경기북부와 경기남부 사람들의 입장차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남부에 집중된 행정인프라를 분산시켜 다 함께 발전해나가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으나, 공공기관 유치 경쟁 대 공공기관 이전 반대시위는 쟁쟁하게 대립을 이룬다. 결국엔 이전이 진행될 것이고 유치를 실패한 지역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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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을 통해 '지역 간의 경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개발과 저개발, 집단이기주의, 님비현상과 핌피현상 등 사회의 지역 이슈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분법적인 나의 시선을 경기북부에 위치한 연천과도 연결 짓고자 한다.
연천은 나에게 다양한 영감을 준다. 군사지역, 생태계와 자연경관, 출생지이자 생활 반경 등 이유도 다양하다. 특히 대표적인 최전방 지역이라는 특수성은 연천을 주제로 다루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연천에서 느끼는 경계에 대한 긴장감은 한탄강으로 대변할 수 있다.
한탄강은 강원도에서부터 흘러내려와 연천 임진강과 만난다. 최전방을 지나오는 강줄기라는 점에서 존재 자체로 복합적인 감정을 들게 만든다. 수많은 강들은 지반 사이를 가르면서 크게는 나라, 작게는 마을을 구분 짓는다. 그리고 이 구분은 사람 간 사이와 같이 지역 간 약자와 강자, 빈곤층과 부유층을 생성시켜 충돌을 만들기도 한다. 자연적, 인위적으로 나뉜 지역 간의 경계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대립구도를 한탄강을 통해 담아내려 한다.
소멸의 정원, 2023
1. 선택적 자연
식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소멸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면서, 재생(再生) 이전의 현상으로 자연 순환 과정의 일부이다. 주류가 되는 것은 쉽게 떠오르는 도식화된 대상이다. 저물고 말라죽어가는 것과 대비되는 싱싱하고 푸릇한 대상들은 인류에게 쉽게 선택되어 왔다.
매년 때가 되면 개화하는 꽃들을 구경하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모이는 행위는 오직 꽃이 가장 화려할 때만을 기다렸다가 짧은 기간 동안 행해지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는 반복된다. 시간이 흘러 꽃이 시들고 보잘것없어질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길은 끊기고 만다. 결국 그들이 향유하고자 하는 자연은 정형화된 일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선택적 자연’이라 일컫겠다.
2. 정원의 기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몇 세기 전부터 우리는 자연을 각자의 방식대로 향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원을 선택하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원에는 설계자 혹은 소유자의 자연관이 드러난다. ‘garden’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간과 즐거움의 합성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나 자연이 매일 같은 모습으로만 존재한다면 인류는 그다지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 공간에 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변화와 소멸이라는 섭리가 있음에 발현되는 것일지 모른다. 저물어 감을 알기에 생명력, 싱그러움을 소장하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선택적 자연)의 결과물은 아닐까?
3. 재료의 확장
소멸 과정의 대상과 유독 선택받지 못하는 재료인 마카의 접점은 나만의 보태니컬 드림에 다가가는 시작점이 된다. 가끔이나마 드로잉북에 이름 적는 용도로나 사용되던 흑백 톤의 마카 5색에서 시작하여 12색 그리고 이제는 거의 50색을 보유하게 되었다. 색상의 다양화로 인해 그림이 실제에 가까워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점차 현실과 멀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 사소한 변화는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주도적인 구성의 단계로 나를 진입시켰다.
정원이란 집안의 뜰이나 꽃밭을 지칭하는 것으로 즉 사유의 공간이다. 입맛대로 골라 담을 수 있는 장바구니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향유되는 대상 외 반대의 것들에 집중하는 동시에, 정원이라는 공간의 이질적인 감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사적인 이야기, 2022
계속해서 펼쳐왔던 작업들의 시초는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본 기록물이 당시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지점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준다. 이미지 자체의 기록을 넘어 그림 하나하나에 당시의 속 사정이 깃든다. 어쩌면 각각 하나의 그림일기 같기도 한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시공간을 넘나들게 만드는 역할을 그림이라는 매체가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하지 못한 순간이 우연히 찾아올 때가 있다.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어 온전히 현재의 시공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순간이 말이다. 그날의 날씨와 하늘의 색, 생활 소음 등 다양한 감각들이 집합되어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 된다. 이는 사건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특히 복잡하고 답답한 시기에 만나는 이러한 경험은 잠시나마 막힌 숨통을 틔우고 새로운 감각들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수많은 날 중에서도 그날의 행적과 사사로운 감정이 더해져 유독 기억에 잘 남는 날들이 있다. 잘못 내린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란 여름날의 하천을 발견했을 때, 예상치 못한 눈보라에 가시거리가 새하얗게 뒤덮이고 있을 때, 아직은 쌀쌀한 봄날 밤 친구들과 함께 했던 한강의 여유 같은 것들이 사소하지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기에 저마다 찾아오는 시공간의 경험은 다르다. 각자의 시선이 머물던 그 자리에 무엇이 자리했는지, 당시의 기분과 환경은 어떠했는지 떠올려 보는 시간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필요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가지고 있던 응어리를 환기시킴으로써 그렇지 않은 경우 보다 더 나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언젠가 오늘을 되새기는 날이 오면 과연 어떠한 하루로 기억하고 있을까? 매일매일이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풍성한 날이 되었으면 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자는 하늘 아래서 별을 찾는다, 2026
별들은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냈고, 까맣던 밤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분명 그런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에 수 놓인 하얀 점들이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혹은 또 다른 존재인지, 이젠 맨눈으로 알 수가 없다. 우주라는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던 아이는 사라졌다. 반짝이는 존재가 부유하는 고철 덩어리였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현재의 내가 남았을 뿐이다. 도시가 밝아질수록 별은 최소한의 밝기조차 잃고 만다. 동시에 서로에게 별을 선물하는 낭만적인 속삭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동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버린 자는 별똥별 마냥 떨어지는 동심을 붙잡지 못한 채 내면 부분 부분을 서서히 소멸시킨다. 소멸은 공복을 만들고, 자연스레 결핍을 채우도록 유도한다. 추억이고, 사랑이고, 소망이었던 별을 향한 동경의 자리를, 평생을 뿌리내리고 살아갈 지면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차지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행이다. 나는 이 땅-전 지구적인 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곡식이 자라고, 철새가 쉬어가고, 산과 바다가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말이다. 미지하고 허황된 공간과 달리 대지는 이끼 덮인 축축하고 습한 생명력을 선사했다. 단단한 곳도 무른 곳도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서로에게 기대어 생을 지속하는 구조를 보면 굉장히 포용적이기도 하다.
땅의 포용력을 닮고자 하는 내게, 일종의 결핍은 세상에 널린 작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커다란 변화보다는 느린 생장에 귀를 기울인다. 느린 생장에는 이끼가 번지는 표면, 뿌리가 파고든 토양,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같이 미세하지만 분명한 생의 흔적들이 포함된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상을 향한 도약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확장이다. 별이 빛을 잃은 시대에 나는 땅이 품고 있는 빛을 그리고자 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자는 하늘 아래서 별을 찾는다, 2026
별들은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냈고, 까맣던 밤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분명 그런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에 수 놓인 하얀 점들이 별 인지 인공위성인지 혹은 또 다른 존재인지, 이젠 맨눈으로 알 수가 없다. 우주라는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던 아이는 사라졌다. 반짝이는 존재가 부유하는 고철 덩어리였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현재의 내가 남았을 뿐이다. 도시가 밝아질수록 별은 최소한의 밝기조차 잃고 만다. 동시에 서로에게 별을 선물하는 낭만적인 속삭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동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버린 자는 별똥별 마냥 떨어지는 동심을 붙잡지 못한 채 내면 부분 부분을 서서히 소멸시킨다. 소멸은 공복을 만들고, 자연스레 결핍을 채우도록 유도한다. 추억이고, 사랑이고, 소망이었던 별을 향한 동경의 자리를, 평생을 뿌리내리고 살아갈 지면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차지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행이다. 나는 이 땅-전 지구적인 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곡식이 자라고, 철새가 쉬어가고, 산과 바다가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말이다. 미지하고 허황된 공간과 달리 대지는 이끼 덮인 축축하고 습한 생명력을 선사했다. 단단한 곳도 무른 곳도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서로에게 기대어 생을 지속하는 구조를 보면 굉장히 포용적이기도 하다.
땅의 포용력을 닮고자 하는 내게, 일종의 결핍은 세상에 널린 작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커다란 변화보다는 느린 생장에 귀를 기울인다. 느린 생장에는 이끼가 번지는 표면, 뿌리가 파고든 토양,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같이 미세하지만 분명한 생의 흔적들이 포함된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이상을 향한 도약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확장이다. 별이 빛을 잃은 시대에 나는 땅이 품고 있는 빛을 그리고자 한다.